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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화폐 자료실
| 한국의 고전 (110) - 두돈오푼에 얽힌 일본의 다섯가지 악행 - 상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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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6078
등록일200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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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고전 / 과거와 현재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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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경 20mm, 무게 5g으로 양복소매에 매달린 단추 크기 만한 두돈오푼
(二錢五分. 동 75%,니켈 25%) 백동화는 우리나라 화폐사에서 그 시대
국민들의 가슴을 가장 멍들게 했던 악화(惡貨)였다.
그러나 오늘날 화폐 수집가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은 뒤로 한 채 두돈오
푼 제작연도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光武二년을 제쳐놓고 개국 504
년 조선, 光武元年~五年등 현존매수가 적은 특년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그 시대 두돈오푼으로 쓰라린 경험을 했던 선조들이 혹시라도 아
신다면 깜짝 놀라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읽었을 것이다.
두돈오푼은 1892년 제작이 시작되어 1901년 중단되었고 구한말 처음에
는 엽전 25매의 가치였다. 신식화폐 중 두돈오푼은 가장 값싼 제작비로
대량 제조할 수 있는 화폐였다.
이 때문에 정부는 급박한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그때그때 무계획
하게 남주(濫鑄)했다. 일본은 위조 두돈오푼을 본국에서 만들어 가져
오는 등 사주전을 대량 제조하여 백성들은 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고
통을 겪게 되었다. 그 후 화폐 교환에서 한국민들이 갖고 있던 두돈오
푼은 대부분 불량주화로 취급되어 한푼의 가치도 없게 되자 앉아서 화
폐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마는 처지가 된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체결 후 한일합방과 침략의 발판을 굳히고 있던 일
본인들은 두돈오푼이 발행되어 교환되기까지(1892~1909) 17년 동안
5가지의 악행(惡行)을 저질렀다. 한국정부와 관리들도 국운이 기울고
있던 그 시대 어떻게 보면 공범자 또는 방조자였다.
다섯 가지 악행 중 첫째는 두돈오푼의 계획적인 ①사주전(私鑄錢)제조,
②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제조기기 및 밀수(密鑄)된 두돈오푼 수입,
③화폐교환 정보 사전 입수, 양화(良貨)의 매점 매석, ④ 불량한 두돈오
푼으로 벽지의 땅 투기, ⑤상평통보 등 구엽전 地金으로 외국수출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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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0월 1일 주한일본공사 林權助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는 「...인천에서는 본국 주요 거류민
으로서 백동화 밀수입에 관여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들은 大阪에 관계자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선박을 빌려
거액의 백동화를 수입하고 있다... 제 3국에 대해 우리의 자세를 의심케 하는 원인이 되므로 차제에 엄중한 처
분을 요하는 동시에 일본국내에 있어서의 취체(取締)를 엄히 하지 않으면 그 효력이 없을 것이니 엄중히 취체
토록 지방장관에게 훈령해주기 바람...」
제 3국이라 함은 이보다 앞서 그 해 3월 19일 백동화의 폐해를 보다못한 서울 주재 각국 공사들이 사신회의(使 臣會議) 결의로 한국정부에 백동화의 주조중지,사주행위 및 위조품 수입엄단을 촉구해 왔기 때문이다.
하버트(H.B.Hulbert)는 기행문에서 「...백동화가 유통되자마자 위조범들이 날뛰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위조에 필요한 기기를 공급하고 밀수입했으며 동시에 수십만 달러의 대가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고 다시 자재가 한
국으로 들어왔다...」고 적었다.
岡庸一이란 일본인은 「불란서의 천주교회당에서도 10여대의 수압 각인기(手押刻印機)를 장치하고 관주전보
다 품질이 더 좋은 백동화를 사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고관 중 일부는 그들의 사저에 이런 기계를 2~3
대씩 장치하고 찍어낸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제조된 위조 백동화는 정미업자 주물업자를 가정하여 한국에 대량밀수출 되었는데 원가는
6~7푼 가량이라고 했다. 일본 관헌에 의해 단속이 되자 아예 한렝構@?운행하던 정기기선 안에서까지 백동화 밀조가 성행되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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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왕실에서는 일정한 상납금을 받고 암암리에 제조를 인정해준 묵주(默鑄),주전액의 일부를 받고 개인이
나 회사에 허가해 준 특주(特鑄), 아예 전환국에서 왕실용으로 찍는 어용분(御用分)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가치는 3푼정도 밖에 안 되는 금속으로 명목가치 2전 5푼은 5~6배 이상의 주전차익(鑄錢差益)을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엽전보다 더 손쉬운 방법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건양원년(1896) 총예산 중
26.6%인 128만 여 원을 백동화 제조에서 오는 이익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인 것이다.
위조 백동화를 만드는 각인기는 일본을 통해 영국과 미국에서도 밀수입되었다고 하니 당시 한국의 위조백
동화에 전 세계의 눈귀가 쏠렸던 것이다.
仁川 府史라는 책에는 당시 경인지방에는 전환국 외에 백동화 사주기계가 150대일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은 백동화에 대해 미온적으로 나가다가 국제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자 1902년 11월 「한국의 백동화
위변조범 처벌령」을 자기 나라에 처음으로 공포했는데 위반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벌금 200원 이하 등 조
폐범으로서는 가벼운 처벌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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