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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화폐 자료실
| 한국의 고전 (111) - 두돈오푼에 얽힌 일본의 다섯가지 악행 - 하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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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5402
등록일200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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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고전 / 과거와 현재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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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은 그 해 7월 12일자에서 「… 통용된 것이 모두 무가치한 악화였으니 사럼着공렌?모두가 도산 탕업
(蕩業)할 것이 명백하다. 갑,을,병의 차별로 교환되는 것이니 그로 인해 손해보는 사람은 더욱 많아진다. …」
고 보도했다.
당시 한국경성상업회의소에서 일본총리 대신에게 보낸 청원서에는 「…그 기밀(화폐교환)은 제정 이전에 재
빨리 일부에 누설되어 양화는 점차로 일부의 손에 들어갔고 한국민은 악화만을 움켜쥐어 부지불식 간에 단두
대에 올려 놓이게 된 꼴이 된 것이다. … 이는 실로 …악덕(惡德)을 돕고 무고(無辜)를 죽이려는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여기서 그 기밀이란 경제정보와 이재에 밝은 일본 상인들과 일본관리 등 약삭빠른 일본인들이 화폐교환 정보
를 사전에 입수한 것을 말함인데 이들은 교환 전에 불량 백동화로 양화를 매점매석해 놓았다가 교환, 횡재를
해 부자가 된 자도 있다는 것이다.
정보에 어두운 대부분의 선량한 한국 백성들은 약 1,000만원, 당시 쌀값으로 치면 약 200만석에 상당하는 악
화를 움켜쥐고 하루아침에 파산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두돈오푼 위조주화 제조의 주범인 일본인들은 화폐교환에 다시 치고 빠지면서 다 먹은 김칫독에 한국민들을
몰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강점기의 문턱에서 화폐로 인한 경제적 수탈은 너무 야비하고 괘씸하면 서도 치욕스런 실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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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 인플레이션과 교환의 부작용 으로 서울에서만 대기업 23개 업체, 중소상인 수백명이 점포를 폐쇄했고 한국인 경영 전당포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일본인들의 보고서에도 「개항장마 다 휴업한 것이나 다름없이 불꺼진 항구가 되었고 하루 2~3백원씩 매상 을 올렸던 점포는 2~3원 밖에 오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본다고 했다. 중간 이하의 가게들은 금융압박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고 적었다.
1905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4만 2,460명 한국인 총수는 약 970만 명이었는데 화폐교환에 응한 3,178명 중 일본인이 51% 1,623명 한국은 중 국인까지 포함해 48.6%인 1,545명 이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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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인이 갖고 있던 두돈오푼 백동화는 거의가 불량품인 병종으로 교환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교환 전에 재빨리 갑,을,종으로 바꿔치기 하여 교환에 응했던 것이다. 교환액수로 쳐도 총 교환
액 852만원 중 일본이 53% 한국인 45.57%에 불과했다.백동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평안북도까지 통용지역이
넓었으나 경상도와 함경도 전남 지방에는 끝까지 통용 되지 않았다.
백동화 교환시기에 더욱 기가 찰 일이 벌어진 것은 순진한 농민을 등쳐먹는 교활한 일본인들의 등장이었다.
일본상인들은 못쓰게 된 불량한 백동화를 모아 가지고 화폐개혁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는 벽지의 농민들을
찾아가 그 돈으로 다시 토지를 사 들였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백동화일 망정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
에 다투어 매물을 내놓았는데 결국은 못쓰게 된 쇠조각 뭉치만 움켜잡게 된 것이다.
그 시대 한국민들은 당백전, 淸錢, 당오전 두돈오푼 백동화 등 새로운 주화가 나올 때마다 앉아서 손해를 보
았고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렸기 때문에 地金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평통보 당이전, 천자문전 등 구 엽
전만을 신뢰했고 종이돈이나 얄팍한 동전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형전인 상평통보 당이전, 천자문전 중에는 명목가치가 다섯배나 높은 당오전보다도 중량이 무거운 것도
있었다.
당오전은 발행(1883)되자마자 다시 사주가 시작되었고 일본인 및 한국인 일부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는 구
엽전으로 공납금을 받으면 최종적으로 나라 금고에는 신주 당오전으로 대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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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엽전은 地金, 즉 구리 값이 높아지 면서 일본으로 수출하면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항장에 는 당오전의 원료인 구리와 상납을 팔러온 일본의 큰 상인들과 구 상평 통보를 구리 값으로 거둬 가는 상인들 로 양면을 이뤘는데 일본인들에겐 항상 한국의 상평통보가 타겟이 되었 다. 구 엽전의 수출은 갈수록 심해져 1905년에는 수출을 지원하라는 일본 의 내훈 속에 포함되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우리 엽전을 수출하여 부 자가 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엽전을 처음에는 녹여서 가져 가다가 노일전쟁 전에는 엽전채 가져가 전쟁 물자로 활용했다. 통용화폐의 지금 수출은 그 나라 재정과 가정경제를 그만큼 빈약하게 만드는 화폐 강렝壎?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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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구 화폐를 정리할 당시 일본 제일은행이 조사한 엽전의 유통액은 총 650만원 정도였는데 백동화의 질
서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적어도 150~350만원 정도의 엽전이 일본상인들에 의해 地金으로 수출, 주로 옛
상평통보가 다른 용도로 녹여진 것이다.
1전은 구한말 은본위 시대 엽전 10매, 금본위 시대는 5매로 교환되었는데 엽전 1,000매를 1원으로 볼 때 국내
에서 유통된 65억매의 엽전 중 절반 이상인 35억매가 밀수출 된 것이다.
상평통보의 地金 밀수출은 국제 구리값이 폭등할 때마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당일전 시대부터(1809)
이루어져 소급해보면 그 규모가 40매를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시대 대다수 한국민들은 구리 값이 높아져
도 이를 수출하여 국제시장에 내다 팔 만큼 정세에 밝지를 못했고 우리 돈을 녹이는 행위는 죄악시했다.
당백전 등 새 화폐가 발행될 때마다 물가폭등으로 인한 고통과 구매력의 상실, 금전사회와 신용사회가 함께
붕괴되는 참혹한 현실을 겪어온 백성들은 옛 상평통보만은 제가치를 지니고 있는 만고불변의 화폐로 국보같
이 아껴왔기 때문에 신화폐 교환에 최종까지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정부는 자국에서 통용중인 화폐를 외국인들이 地金으로 팔기위해 공공연히 가져가는 것도 지키지 못했
으니 화폐에 관한 법률이나 통화정책은 사문화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구한말 백성들도 나라의 화폐제도 및 허물어진 화폐가치에 등을 돌려 왕권이든 정권이
든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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